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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야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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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야 왕은 덴무 천황의 손자이자 고시 황자의 아들로, 율령에 정통하고 뛰어난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아 우대신까지 오른 인물이다. 704년 정4위로 조정에 진출하여 식부경, 대납언을 거쳐 721년 우대신이 되었으며, 신라 사신을 접대하고 한시를 짓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후지와라노 후히토 사후 황친으로서 정계를 주도했으나, 729년 '나가야 왕의 변'으로 자결하며 생을 마감했다. 그의 저택터가 발굴되어 당시 귀족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으며, 나가야 왕이 생전에 친왕으로 불렸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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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야 왕
기본 정보
이름나가야 왕
로마자 표기Nagaya-no-ōkimi
나가야 왕 초상 (남법화사 소장, 에도 시대)
출생684년
사망729년 3월 20일
사망 장소나라, 일본
관직
관위정2위좌대신
가족 관계
아버지다케치 왕자
어머니미나베 공주
배우자기비 내친왕 (정비)
이시카와 씨 부인
후지와라 나가코
아베노 오토지
지누 공주
자녀가시와데 왕자
가쓰라기 왕자
가고토리 왕자
구와타 왕자
아스카베 왕자
기부미 왕자
야마시로 왕자 (후지와라노 오토사다)
교쇼 공주
가모 공주
마도카타 공주
생애
시대아스카 시대 - 나라 시대
출생 (일본어 문서 기준)덴무 천황 5년 (676년) 혹은 13년 (684년)
사망 (일본어 문서 기준)신귀 6년 2월 12일 (729년 3월 16일)
묘소야마토 국 이코마 군 이쿠마 산, 현재 나라현 이코마 군 헤구리 정 리모토 (궁내청 지정)

2. 생애

나가야 왕(長屋王)은 아스카 시대 말기부터 나라 시대 전기에 활동한 일본의 황족이자 공경(公卿)이다. 덴무 천황(天武天皇)의 손자이자 임신의 난에서 활약한 다케치 황자(高市皇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덴지 천황(天智天皇)의 딸 미나베 내친왕(御名部內親王)이다. 이러한 고귀한 혈통 덕분에 그는 황위 계승에 매우 가까운 유력한 황족으로 간주되었다.

게이운(景雲) 원년(704년) 정사위상(正四位上)이라는 파격적인 관위를 받으며 정계에 등장했는데, 이는 일반적인 황족 2세보다 3단계나 높은 이례적인 대우였다. 이후 궁내경(宮内卿), 식부경(式部卿) 등을 거쳐 요로 2년(718년)에는 대납언(大納言)에 임명되었고, 우대신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 사후인 요로 5년(721년)에는 우대신에, 신귀 원년(724년) 쇼무 천황(聖武天皇) 즉위와 함께 좌대신에 오르며 정계 최고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는 도네리 친왕(舎人親王)과 함께 황친(皇親) 중심의 정치를 펼쳤다.

나가야 왕의 주요 관직 경력
연도 (일본 연호)날짜내용
대보 4년(704년)정월 7일정사위상(직서)
화동 2년(709년)11월 1일종삼위[56]
화동 2년(709년)11월 2일궁내경
화동 3년(710년)4월 23일식부경
화동 7년(714년)7월 3일익봉 100호 추가
영귀 2년(716년)정월 5일정삼위
양로 2년(718년)3월 10일대납언(중납언, 참의를 거치지 않음)
양로 5년(721년)정월 5일종이위, 우대신
양로 5년(721년)3월 25일대도사인(大舎人) 10명 하사
양로 5년(721년)5월 20일 10만 속, 벼 이삭 400곡 하사
양로 5년(721년)12월 8일어장속사(御帳前次第司)
신귀 원년(724년)2월 4일정이위, 좌대신



그러나 나가야 왕의 강력한 권력과 황위 계승 가능성은 쇼무 천황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하려던 후지와라 사형제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결국 진키 6년(729년) 2월, 나가야 왕이 좌도(左道)를 이용해 국가를 전복하려 한다는 누리베노 기미타리(漆部君足) 등의 밀고를 받아 저택이 포위되었고, 심문 끝에 부인 기비 내친왕(吉備内親王)과 아들들과 함께 자결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나가야 왕의 변).[32][38] 이 사건은 정적인 나가야 왕을 제거하기 위한 후지와라 사형제의 정치적 모략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43]

2. 1. 초기 생애

덴무 천황의 손자이자 임신의 난에서 활약한 다케치 황자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덴지 천황의 딸인 미나베 내친왕으로, 겐메이 천황의 동복 언니이다. 이러한 혈통 덕분에 나가야 왕은 황족 중에서도 중심 혈통에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대보선임령(大宝選任令)의 음위 규정에 따라 다이호 4년(704년) 처음 관직에 나아갔을 때의 나이를 21세로 계산하여 덴무 천황 13년(684년)에 태어났다는 설이 유력하다.[2] 하지만 『회풍조』에 기록된 향년 54세를 기준으로 하면 덴무 천황 5년(676년) 출생이라는 설도 존재한다.[3]

게이운 원년(704년) 정4위하(正四位下)라는 높은 관위를 받으며 정계에 등장했다. 와도 2년(709년)에는 종3위(従三位) 궁내경(宮内卿)이 되었고, 다음 해에는 식부경(式部卿)을 역임했으며, 레이키 2년(716년)에는 정3위(正三位)로 승진했다. 헤이조쿄 천도 이후에는 우대신 후지와라노 후히토, 도네리 친왕 등과 함께 국정을 이끌었다.

나가야 왕은 부계와 모계 모두 덴무 천황덴지 천황의 직계 후손일 뿐만 아니라, 그의 할머니는 소가(蘇我) 가문 출신이었다. 또한 그의 부인 중 한 명인 기비 내친왕 역시 소가씨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다른 부인으로는 이시카와노 무시마로(石川虫麻呂)의 딸과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딸 후지와라노 나가코(藤原長娥子)가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혼인 관계와 혈통은 나가야 왕 자신이나 그의 아내 기비 내친왕이 황위에 오를 가능성을 높였고, 만약 당시 황태자였던 오비토 황자(首皇子)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했다. 나가야 왕가는 소가계 황족, 소가씨, 후지와라씨라는 세 주요 세력과 모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지와라노 후히토 사후 권력을 장악하려던 후지와라 4형제에게 큰 위협이자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4] 나가야 왕 일가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을 때, 장애가 있던 아들을 제외한 가족들이 모두 죽음을 강요당한 것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 있다.[4] 다만, 나가야 왕가를 경계했던 주체가 후지와라 씨가 아니라 쇼무 천황 자신이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5]

2. 2. 나가야 왕 정권

717년 좌대신(左大臣) 이소노카미노 마로(石上麻呂)가 사망하고 이듬해인 718년 나가야 왕은 참의(参議)나 중납언(中納言)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납언(大納言)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그는 태정관(太政官)에서 우대신(右大臣)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 다음 가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가야 왕이 정4위상(正四位上)이라는 높은 지위에서 시작하여 이처럼 이례적인 승진을 한 배경에는 여러 해석이 있다. 아버지 다카이치노미코(高市皇子)가 황태자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전통적인 설 외에도, 당시 황친(皇親) 및 위계(位階) 제도가 정비되던 시기의 특수성, 천무천황(天武天皇)의 손자이자 천지천황(天智天皇)의 외손자라는 유력한 혈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7] 또한, 부인 기비 내친왕(吉備内親王)의 언니인 겐쇼 천황(元正天皇)과 장인 후지와라노 후히토 두 유력자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특히 겐쇼 천황은 즉위 전 기비 내친왕과 함께 지냈던 것으로 추정되며, 나가야 왕을 깊이 신임했을 수 있다.[8][9] 나가야 왕은 신라에서 온 사신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청해 성대한 연회를 열기도 했는데, 이때 지은 한시(漢詩)가 《회풍조》(懐風藻)에 실려 전해진다.

720년 8월, 장인이자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였던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사망하자, 이듬해인 721년 정월 나가야 왕은 종2위(従二位) 우대신(右大臣)에 임명되어 정계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했다.[60] 당시 후히토의 아들들인 후지와라 사형제(후지와라 무치마로, 후지와라 후사사키, 후지와라노 우마카이, 후지와라 마로)는 아직 정치적 기반이 약했고, 의정관(議政官)에는 후지와라 무치마로(중납언)와 후지와라 후사사키(참의) 정도만 참여하고 있었다. 이에 나가야 왕은 지태정관사(知太政官事) 도네리 친왕(舎人親王)과 함께 황친(皇親) 중심의 정치 세력을 형성하여 후지와라 씨를 압도했다.

나가야 왕은 정권을 잡은 후, 와도 연간(和銅年間)부터 심화되던 백성들의 빈곤화와 요역(徭役) 기피 현상에 대응하여 사회 안정과 율령제(律令制) 유지를 목표로 하는 정책들을 추진했는데, 이는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정치 노선을 계승한 것이기도 했다.[8]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다.

  • 민생 안정 및 부담 경감 (위무·구휼책):[23]
  • 721년 3월: 수해와 가뭄 피해를 입은 헤이조쿄(平城京) 및 기내(畿内) 백성에게 1년간 조(調) 면제, 그 외 칠도(七道) 백성에게는 부역(夫役) 면제.[10]
  • 721년 6월: 하야토(隼人)와 에미시(蝦夷) 반란 진압에 동원된 병사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무쓰(陸奥)와 규슈(九州) 백성에게 1년간 조(租)·용(庸) 면제. 전사자의 경우 부자(父子) 모두 1년간 조세 면제.[11]
  • 722년 2월: 위사(衛士)의 과도한 복무 기간으로 인한 탈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근무 연한을 3년으로 제한하고 교체를 의무화.[12]
  • 722년 윤4월: 무쓰 안찰사(陸奥按察使) 관할 지역 백성의 조(調)·용(庸)을 점진적으로 면제하고,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며 군사 훈련(승마, 궁술) 실시. 변방 지원을 위해 마포(麻布)를 징수하여 에미시에게 지급할 녹봉(祿)으로 충당. 무쓰 출신으로 중앙에서 일하는 자(위사, 사인(資人), 채녀(采女) 등)는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냄.[13]
  • 723년 4월: 병역 부담이 크고 기근과 역병이 발생한 히무카(日向)·오스미(大隅)·사쓰마(薩摩) 3개 국 백성에게 3년간 조세 면제.[14]

  • 개간 장려책 (개전책):[15]
  • 722년 윤4월: 100만 정보 개간 계획(百万町歩開墾計画)을 발표하여, 가을 수확 후 10일간 백성을 동원하고 관의 물자를 활용해 대규모 농지 개간을 추진. 관리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고 태만 시 관직 해임.[13]
  • 723년 4월: 인구 증가로 인한 구분전(口分田) 부족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삼세일신법(三世一身法)을 공포. 새로 땅을 개간하면 3대까지, 기존 땅을 개량하면 본인 대까지 토지 소유를 인정하여 개간을 장려.[16]

  • 반란 진압: 율령제 지배가 강화되면서 변방의 에미시와 하야토의 반란이 잦았으나, 나가야 왕은 최고 책임자로서 신속하게 대처하여 반란을 진압했다.[17]
  • 720년 9월: 에미시가 반란을 일으켜 무쓰 안찰사 가미쓰케누노 히로토(上毛野広人)가 살해되자,[18] 다음 날 즉시 다지히노 아가타모리(多治比県守)를 지절정이장군(持節征夷将軍)으로, 아베노 스루가마로(阿倍駿河)를 지절진적장군(持節鎮狄将軍)으로 임명하고 절도(節刀)를 수여하여 진압군 파견.[19]
  • 724년 3월: 해도(海道)의 에미시가 반란을 일으켜 무쓰 다이조(陸奥大掾) 사에키노 고야마로(佐伯児屋麻呂)가 살해되자,[20] 약 한 달 만에 후지와라노 우마카이(藤原宇合)를 지절대장군(持節大将軍)으로, 다카하시노 야스마로(高橋安麻呂)를 부장군(副将軍)으로 임명하여 정벌군 파견.[21] 동시에 간토 9개 국 병사 3만 명에게 군사 훈련 실시.[22]

  • 관인 통제 강화 (강기숙정): 백성 구휼책과 더불어 관리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기강을 바로 세우는 정책도 시행했다.[23]
  • 727년 2월: 각 관청의 장관에게 소속 관리(주전(主典) 이상)의 근무 실태를 평가(최상, 차상, 중등, 하등 4단계)하여 보고하도록 명령.[24] 같은 해 3월 보고 결과에 따라 우수 관리에게는 비단을 포상하고, 근무 태만자는 관직에서 해임.[25][26] 이때 나가야 왕 자신은 종2위 최상으로 평가받아 비단 100필을 하사받았다.
  • 728년 3월: 이전까지 외위(外位) 대상이 아니었던 중앙 관리들에게도 외오위(外五位) 서임을 확대하고 관련 규정 정비.[27] 같은 해 5월 실제 서임 실시.[28]


진키(神亀) 원년(724년) 쇼무 천황(聖武天皇)이 즉위하던 날, 나가야 왕은 정2위(正二位) 좌대신(左大臣)으로 승진하며 권력의 정점에 섰다.

2. 3. 나가야 왕의 변

쇼무 천황이 자신의 생모인 후지와라노 미야코(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딸)에게 “대부인(大夫人)” 칭호를 내리려 하자, 나가야 왕은 율령에 명시된 “황태부인(皇太夫人)”과의 차이를 지적하며 반대했다. 결국 쇼무 천황은 이를 철회하고 문서상으로는 “황태부인”, 구두로는 “대묘조(大御祖)”라 칭하도록 했다(신사사건).[36] 이 사건은 율령의 규정을 중시한 나가야 왕과 천황의 권위를 내세우려던 후지와라 사형제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표면화되는 계기가 되었다.[37][29]

나가야 왕과 기비 내친왕 사이의 아들들(젠푸왕, 스와다왕, 쿠즈키왕, 카기토리왕)은 일찍이 황손으로 대우받으라는 조칙이 내려지는 등[38] 어느 정도의 황위 계승권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만약 쇼무 천황이나 그의 직계 후계자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나가야 왕의 아들들이 덴무 천황계 남자 황족으로서 유력한 계승 후보가 될 수 있었다. 이는 쇼무 천황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강화하려던 후지와라 사형제에게 나가야 왕 일가를 위협적인 존재로 만들었다.[38] 또한, 어머니가 황족이 아니었고 병약했던 쇼무 천황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존재했으며,[34] 쇼무 천황은 후지와라 고묘시 소생의 모토 왕을 생후 얼마 되지 않아 황태자로 책봉하여 자신의 지위를 안정시키려 했으나,[39] 나가야 왕은 이러한 조치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41] 그러나 모토 왕은 신귀 5년(728년) 1세가 되기 전에 요절했고, 후지와라 씨가 아닌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히로토지 소생의 아사카 친왕만이 남게 되면서 쇼무 천황의 후계 구도는 더욱 불안정해졌다.[38]

진키 6년(729년) 2월, 누리베노 기미타리와 나카토미노 미야쿠노 아즈마히토는 "나가야 왕이 몰래 좌도(左道)를 배워 나라를 전복시키려 한다"고 밀고했다. 일설에는 전년에 요절한 모토 왕을 저주하여 죽였다는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42] 후지와라노 우마카이 등이 이끄는 육위부 군사들이 나가야 왕의 저택을 포위했고,[32] 사토 친왕(도네리 친왕) 등의 심문 끝에[32] 나가야 왕은 부인 기비 내친왕과 네 명의 아들들과 함께 자결하였다.[38] 당시 나가야 왕의 나이는 46세(또는 54세)였다. 율령에서는 황족이나 귀족에게 사형 대신 자결을 허용하는 규정이 있었으나, 나가야 왕의 자결이 자의에 의한 것인지 강요에 의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의 동생, 자매, 다른 부인 소생의 자녀들, 저택의 하인 등은 연좌되지 않고 사면되었다.

나가야 왕 묘(나라현 이코마군 헤구리정)


이 사건은 일반적으로 나가야 왕의 변이라 불리며, 후지와라 사형제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정치적 모략이자 무고였다는 설이 유력하다.[43] 나가야 왕이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후지와라 씨에 대항할 만한 충분한 세력을 구축하지 못했고,[43] 일부에서는 그의 정책이 독선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관료들의 불만을 샀다는 견해도 있다.[44] 더 나아가, 쇼무 천황 자신이 황위 계승의 불안정성 때문에 나가야 왕 일가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제거를 주도했다는 견해도 제기된다.[5]

나가야 왕 사후, 같은 해 8월 후지와라 후히토의 딸 고묘시가 황후가 되었고, 후지와라 사형제는 의정관과 요직을 차지하며 후지와라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덴표 9년(737년)에 사형제 모두 천연두로 사망하자, 나가야 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한 저주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나가야 왕을 추숭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45] 이듬해인 덴표 10년(738년), 나가야 왕을 밀고했던 나카토미노 미야쿠노 아즈마히토가 과거 나가야 왕을 섬겼던 오토모노 고무시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속일본기》는 이 사건을 기록하며 아즈마히토의 고발을 "무고(誣告)"라고 명시했는데, 이는 《속일본기》가 편찬된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이미 조정 내에서 나가야 왕이 죄 없이 죽음을 당했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음을 시사한다.[46]

3. 나가야 왕의 저택 발굴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나라시 니조오도리(二条大路) 남쪽에 위치한 나라 소고(奈良そごう) 백화점 건설 예정지에서 나라 문화재 연구소에 의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52][53] 이 조사 과정에서 1988년, 나라 시대 귀족의 저택 터가 다량의 목간(나가야왕가 목간)과 유물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나가야 왕의 저택임이 밝혀졌다.[52][53]

나가야 왕의 저택은 헤이조쿄 궁의 동남쪽 모퉁이에 인접한 고급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니조오도리에 면하고 남쪽으로는 헤이조쿄 좌경 삼조 이방(左京三条二坊) 터의 곡수원(曲水苑) 연못 정원과 마주하고 있었다. 저택의 규모는 약 30000m2에 달했다.[54] 발굴된 약 4만 점에 달하는 목간 중에서는 "나가야 친왕(長屋親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목간도 발견되어, 이곳이 나가야 왕의 저택이었음을 명확히 증명했다. 이 발굴은 나라 시대 귀족의 생활상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발굴된 유구는 지역 주민과 연구자들의 보존 요구에도 불구하고, 건설 공사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었다. 해당 부지에는 나라 소고 백화점과 이토요카도 나라점(イトーヨーカドー奈良店)이 들어섰다. 공교롭게도 1988년 발굴 이후 건설된 소고 백화점은 완공 12년 만에 파산했으며, 두 매장 모두 2017년에 폐점하였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나가야 왕의 저주(長屋王の呪い)"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55]

이후 2018년 4월, 해당 부지는 '미·나라(ミ・ナーラ)'라는 이름의 상업 시설로 새롭게 단장하여 개장했다. 현재 저택 터 부지 한쪽에는 나가야 왕 저택이었음을 알리는 기념비만 설치되어 있다.

4. 평가 및 논란

덴무 천황의 손자로서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였던 나가야 왕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정치적 실력자였으나, 후지와라씨와의 권력 투쟁 속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나가야 왕과 쇼무 천황후지와라씨 사이의 갈등은 쇼무 천황이 생모인 후지와라노 미야코(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딸)에게 율령에 없는 '대부인'(大夫人) 칭호를 내리려 했을 때 시작되었다. 나가야 왕은 율령 규정을 들어 이에 반대했고 결국 철회시켰지만, 이는 후지와라 씨의 반감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729년 2월, 누리베노 기미타리(漆部君足)와 나카토미노 미야쿠노 아즈마히토(中臣宮處東人)는 나가야 왕이 몰래 사도(私道)를 배워 나라를 뒤엎으려 한다고 밀고했다. 후지와라노 우마카이 등이 이끄는 군사들에게 저택이 포위되었고, 도네리 친왕의 심문을 받은 나가야 왕은 이틀 뒤 자결하였다. 그의 나이 향년 46세(또는 54세)였다. 부인인 기비 내친왕과 네 명의 아들 역시 같은 날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은 나가야 왕의 정변이라 불리며, 현재는 후지와라 씨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무고 사건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나가야 왕의 아들들이 덴무 천황계의 유력한 황위 계승자였다는 점이 그가 제거되어야 했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나가야 왕 사후,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딸 고묘시가 황후가 되고 후지와라 4형제(후지와라노 무치마로, 후지와라노 후사사키, 후지와라노 우마카이, 후지와라노 마로)가 조정을 장악하며 후지와라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737년 이들 4형제가 모두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정권은 크게 흔들렸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가야 왕의 저주라는 소문이 돌며 그를 추숭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속일본기》(続日本紀) 편찬 당시 나가야 왕을 밀고했던 아즈마히토의 행위를 '무고'(誣告)라고 기록한 점은 헤이안 시대 초기 조정에서 이미 나가야 왕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치적 비극과 별개로 나가야 왕은 당대의 뛰어난 문화인이기도 했다.


  • 712년728년 두 차례에 걸쳐 부모와 역대 천황들을 위해 《대반야경》(大般若經) 6백 권을 사경했으며, 이는 《나가야 왕 원경》(《진키경》)의 일부로 현재까지 전해진다.
  • 불교를 깊이 신봉하여 당나라의 승려 감진에게 가사 1천 장을 보시했는데, 가사 가장자리에 수놓아진 "산천은 지역이 달라도 풍월은 같은 하늘 아래 있으니, 여러 불자들이여 함께 내세의 인연을 맺읍시다(山川異域 風月同天 寄諸仏子 共結來縁일본어)"라는 글귀는 감진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그가 일본으로 건너올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50]
  • 719년에는 신라에서 온 사신을 자신의 저택에서 성대하게 맞이하며 연회를 베풀었고, 이때 지은 한시를 포함하여 총 3수가 『회풍조』(懐風藻)에 실려 있다.
  • 나라현 헤이조쿄 유적의 나가야 왕 저택 터에서 발굴된 다량의 목간은 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목간 기록을 통해 그가 여름에 얼음을 저장해두고 사용하는 빙실을 소유했으며, 개에게 귀한 쌀을 먹이로 주었다는 사실 등이 밝혀졌다. 개에게 쌀을 준 이유에 대해서는 손님 접대용 식용견이었다는 설[47]과 매사냥에 쓰이는 개였다는 설[48]이 있다. 또한, 그의 연봉은 현재 가치로 약 4억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49]


반면, 설화집인 《일본영이기》(日本霊異記) 중권1에는 나가야 왕이 불교 법회에서 신분이 낮은 승려를 상아로 만든 홀(笏)으로 때려 죽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는 그가 오만한 인물이었으며 그 때문에 불법의 벌을 받아 몰락했다는 내용으로, 민중에게 전승되면서 귀족 중심의 불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4. 1. 나가야 친왕설

나가야 왕(長屋王)의 저택 터에서 발굴된 목간에 "長屋親王宮鮑大贄十編"이라는 글자가 있었던 점과, 『일본령이기』의 나가야 왕 관련 설화에서 "長屋親王"이라고 칭하고 있는 점 등을 근거로, 그가 생전에 나가야 친왕(長屋親王)으로 불렸다는 학설이 있다. 나가야 왕과 기비 나이친왕(吉備内親王) 사이의 자녀들이 외조모인 겐메이 천황(元明天皇)에 의해 이세왕(二世王)(원래는 텐무 천황(天武天皇)의 삼세왕)의 대우를 받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나가야 왕 역시 특별한 대우를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러나 일반적인 율령 해석에 따르면, 친왕 칭호는 천황의 아들이나 손자 중 천황으로부터 친왕 선하(宣下)를 받은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長屋親王"이라는 칭호는 나가야 왕가 내부에서만 사용된 사칭(私稱)이었으며, 공적인 자리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는 반론도 있다. 이 설에 따르면, 내부적으로만 허용되던 사칭이 율령 규정을 어기고 공적인 자리에서 사용되는 것에 대한 반대가, 신사(辛巳)년에 일어난 사건에서 나가야 왕 측이 "대부인(大夫人)" 칭호 사용에 반대한 주장의 근거였다고 본다. 이는 천황과 후지와라 씨(藤原氏)에 의한 국가의 사물화(私物化)에 대한 반발 심리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51]

4. 2. 나가야 왕의 저주

나가야 왕이 729년 정변으로 자결한 이후,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후지와라씨 4형제(후지와라노 무치마로, 후지와라노 후사사키, 후지와라노 우마카이, 후지와라노 마로)는 고묘 황후를 내세워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들 4형제는 737년에 유행한 천연두(735년-737년 일본 천연두 유행)로 모두 사망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나가야 왕의 원한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저주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52][53] 나가야 왕을 추숭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그의 죽음이 부당했음을 인정하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738년 7월 10일, 좌병고(左兵庫)의 大伴子蟲|오토모노 고무시일본어가 우병고(右兵庫)의 수장이 된 中臣宮處東人|나카토미노 미야쿠노 아즈마히토일본어와 바둑을 두던 중 나가야 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격분하여 그를 참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즈마히토는 일찍이 나가야 왕이 사도(私道)를 배워 나라를 어지럽히려 한다고 밀고하여 정변의 빌미를 제공했던 인물이다. 이 사건을 기록한 《속일본기》(続日本紀|쇼쿠니혼기일본어)는 아즈마히토의 고발을 '무고'(誣告)라고 명시하고 있어, 편찬 당시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헤이안 지다이일본어) 초기 조정에서도 나가야 왕이 죄 없이 죽었다고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나가야 왕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나라시(奈良市|나라시일본어) 헤이조쿄(平城京|헤이조쿄일본어) 유적 근처에서 백화점 건설을 위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1988년, 이 부지에서 나가야 왕의 저택 유적이 다량의 목간(木簡|못칸일본어)과 함께 발견되었다.[52][53] 저택은 약 30000m2에 달하는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었으며[54], 출토된 4만 점의 목간은 당시 귀족 생활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지역 주민과 연구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고 백화점 측은 공사를 강행하여 유적의 대부분을 파괴하고 '나라 소고'를 건설했다. 하지만 '나라 소고'는 완공 12년 만에 파산했고, 이후 들어선 '이토요카도 나라점' 역시 2017년에 폐점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가야 왕의 저주"라는 소문이 다시 퍼져나갔다.[55] 현재 해당 부지는 2018년 ミ・ナーラ|미·나라일본어라는 이름의 복합 시설로 리뉴얼되었으며, 한쪽에 나가야 왕 저택 터였음을 알리는 기념비만 남아 있다.

5. 가족 관계

아버지는 덴무 천황의 아들인 다케치 황자(고시황자(高市皇子))이며, 어머니는 덴지 천황의 딸인 미나베 내친왕(미나베황녀(御名部皇女))이다. 나가야 왕은 황족으로서 직류(嫡流)에 매우 가까운 혈통이었다.

나가야 왕의 조모는 소가씨 출신이며, 배우자인 기비 내친왕 역시 소가씨 혈통을 이어받았다. 다른 배우자로는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딸인 후지와라노 나가코 등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나가야 왕가는 소가계 황족 혈통, 소가씨 혈통, 후지와라씨 혈통을 모두 갖추고 있어 차기 황위 계승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는 후지와라 후히토 사후 후지와라 씨족에게 경계와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4] 나가야 왕 일가가 자살을 강요당했을 때,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황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자녀가 함께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는 후지와라씨의 야망에 방해가 되는 존재가 이들에게 국한되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4] 한편, 나가야 왕가에 대한 경계를 품었던 것은 후지와라씨가 아니라 쇼무 천황이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5]

'''나가야 왕의 배우자와 자녀'''
배우자자녀
기비 내친왕
(구사카베 황자와 겐메이 천황의 딸)
후지와라노 나가코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딸)
이시카와 부인
(이시카와노 무시나의 딸로 추정)
아베노 오토지
(아베노 히로니와의 딸)[57]
생모 불명



나가야 왕의 후예 씨족인 다카시나 씨(高階氏)는 삼촌 도네리 친왕의 후예 씨족인 기요하라 씨(清原氏)와 함께 오랫동안 그 혈통을 유지한 몇 안 되는 덴무계 후예 가문 중 하나이다. 헤이안 시대 말기 고시라카와 천황의 총애를 받은 단고노 쓰보네(丹後局) 에이코(栄子)도 다카시나 씨였으며,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도와 무로마치 막부 개창에 공을 세운 고 모로나오와 그 동생 모로야스(師泰) 역시 다카시나 씨로 나가야 왕의 후손에 해당한다.

참조

[1] 문서 She may be Prince Nagaya's wife not daughter.
[2] 서적 長屋王時代 東京大学出版会 1982
[3] 서적 長屋王の年齢 おうふう 1993
[4] 서적 蘇我氏 古代豪族の興亡 中央公論新社 2015
[5] 서적 古代政治史における天皇制の論理 増訂版 吉川弘文館 2014
[6] 간행물 続日本紀 和銅6年4月25日
[7] 서적 長屋王 吉川弘文館 1999
[8] 문서 森田[1993: 167]
[9] 서적 行基の宗教運動 (제목에서 추출 불가능)
[10] 간행물 続日本紀 養老5年3月7日
[11] 간행물 続日本紀 養老5年6月10日
[12] 간행물 続日本紀 養老6年2月23日
[13] 간행물 続日本紀 養老6年閏4月25日
[14] 간행물 続日本紀 養老7年4月8日
[15] 문서 森田[1993: 165]
[16] 간행물 続日本紀 養老7年4月17日
[17] 문서 森田[1993: 164]
[18] 간행물 続日本紀 養老4年9月28日
[19] 간행물 続日本紀 養老4年9月29日
[20] 간행물 続日本紀 神亀元年3月25日
[21] 간행물 続日本紀 神亀元年4月7日
[22] 간행물 続日本紀 神亀元年4月14日
[23] 문서 木本[2003: 8]
[24] 간행물 続日本紀 神亀4年2月21日
[25] 간행물 続日本紀 神亀4年3月3日
[26] 간행물 続日本紀 神亀4年3月13日
[27] 간행물 続日本紀 神亀5年3月28日
[28] 간행물 続日本紀 神亀5年5月21日
[29] 간행물 続日本紀 養老5年10月13日
[30] 서적 藤原麻呂の前半生について-長屋王の変前夜まで- 甲子園短期大学紀要 2010
[31] 간행물 続日本紀 養老5年12月7日
[32] 간행물 続日本紀 養老6年正月20日
[33] 문서 (제목에서 추출 불가능)
[34] 서적 律令制下天皇即位時の特別昇叙について 塙書房 2021
[35] 간행물 続日本紀 神亀元年2月6日
[36] 서적 『続日本紀』神亀元年3月22日条
[37] 서적 律令国家と隋唐文明 岩波書店 2020
[38] 서적 1993
[39] 서적 『続日本紀』神亀4年11月2日条
[40] 서적 『続日本紀』神亀4年11月14日条
[41] 서적 2013
[42] 서적 2013
[43] 서적 1993
[44] 서적 2003
[45] 문서 それを明言した同時代史料はないが、同年10月20日に長屋王の遺児・安宿王、黄文王らに不定期の叙位があったのはその傍証とされる。
[46] 서적 日本の履歴 3 奈良の都 中公文庫 1973
[47] 서적 犬を食べた貴族 講談社 1989
[48] 서적 食の考古学 東京大学出版会 1996
[49] 서적 古代史発掘 新遺跡カタログ ’88~’90 VOL.3 朝日新聞社 1991
[50] 서적 『唐大和上東征伝』
[51] 서적 藤原宮子の「大夫人」称号事件について 塙書房 2021
[52] 문서 ただし、この邸宅について本来は吉備内親王及びその姉の氷高内親王(元正天皇)の邸宅であり、氷高の即位及び吉備と長屋王の婚姻によって長屋王も居住するようになった「吉備内親王邸」であるとする森田悌及び作家の永井路子による異説もある。
[53] 웹사이트 ご存知ですか? 1月12日は奈良時代の長屋王邸宅跡が判明した日です https://bunshun.jp/a[...] 文春オンライン 2018-01-12
[54] 서적 詳説 日本史図録 山川出版社 2011
[55] 웹사이트 奈良の商業地にささやかれる「長屋王の呪い」 「そごう」「ヨーカドー」が相次ぎ閉店 怨念は晴れるのか https://www.sankei.c[...] 2024-07-04
[56] 서적 『公卿補任』
[57] 서적 長屋王家木簡と奈良朝政治史 吉川弘文館 1993
[58] 서적 2003
[59] 서적 2003
[60] 문서 당시 의정관(議政官)에서 산기(参議)로 있는 후사사키(房前)를 제외하고 나머지 후히토의 세 아들은 아직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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